잡설근황
거지같은 비유지만. 나름 고심했음.
님이 싫어하는 인간을 하나 머릿속에 그려봅시다. 좌빨, 수꼴, 개독, 꼴페미, 개마초, 재벌, 노조, 특정 정치인이나 연예인, 기타 명사, 무개념한 빠 또는 까, 눈엣가시같은 친구/이웃/동료, 성격 더러운 선배/고참/상관, 개념없는 후배/쫄/부하, 등등, 등등. 하나 정도는 있겠죠. 하나도 없다고? 세상에 싫어하는 인간이 단 하나도 없어? 존경합니다. 성불하세요. 아님 니네 별로 돌아가. 나머지 인간 분들은 고르셨나요? 떠올리니 마음속에서 적개심, 혐오감, 경멸감이 불타오르나요? 그럼 됐어요. 그를 갑이라고 칭하죠.
보통 싫다고 하면 이유가 있겠죠. 설사 아무 이유 없이 싫다고 해도 인간은 합리적인 걸 좋아하는 동물이라 억지로라도 이유를 만들어 갖다 붙이게 마련이에요.
'갑은 A라서 싫다!'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상관없어요. 왜 상관없는지는 곧 설명하죠. 자. 이제 갑의 지지자들이 등장합니다. 당신이 갑을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들은 갑을 옹호해 주고 싶어지겠죠. 모든 사람들이 다 '난 남들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까든말든 별 상관 안한다능' 하는 쿨가이는 아니거든요. 그들이 사용하는 패턴은 99.9% 다음 세 가지 중에 하납니다.
1. '니가 잘못 알고 있어. 갑은 A가 아니야.'
2. '갑이 A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건 갑의 탓이 아니야.'
3. 'A 아닌 사람도 있냐?' 또는 '갑에겐 B라는 좋은 점도 있어.'
당신이 정말 갑을 싫어한다면 십중팔구 이런 반박쯤은 예상해 봤을 겁니다. 떠오르죠? 그럼 당신은 재반박을 하고 싶어질 겁니다. 다음과 같이요.
1. '웃기시네 잘못 아는 건 너야. 갑은 A가 맞아. 무개념 빠 같으니라고.'
2. '그래서 어쩌라고. 그럼 갑이 A가 아니게 되기라도 하냐?'
3. '그래서 어쩌라고 (2). 그게 A를 정당화시켜주냐.'
99%의 논쟁들은 대립하고 있는 상호간에 이 패턴을 주고받고 되풀이하는 걸로 이루어집니다. 뭐 세상에 어느 쪽이 맞고 그르다고 딱 정해지는 문제는 별로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는 이걸로 끝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갑이 싫다는 자신의 느낌/주장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지요.
그런데 만일 지지자들의 의견이 훨씬 설득력있는 경우에,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예를 들면
1. 갑은 사실 확인 결과 명명백백히 A가 아니었다.
2. 갑이 A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납득이 가는 것이었고, 그에 따르면 A는 갑의 단점이 되지 않는다.
3. A는 정말로 (B에 비하면) 지엽적이고 사소한 단점이라, 당신의 주장은 꼬투리잡기에 불과했다.
당신은 갑에 대한 지금까지의 부정적인 판단을 철회하고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솔직히 인정할까요?
ㅋㅋㅋㅋㅋㅋ
천만에요.
안그래요.
그렇게 하는 사람은 극소수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지자들이 내놓은 근거를 '그냥'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아무리 그게 명백하고 대세이고 합리적이어도요. 이런 사람들이 진상 소리를 듣는 거고, 말 없이 버로우하는 건 차라리 양반에 속하죠.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싫다'는 감정 자체는 오랫동안 안 사라집니다. 죽어도 절대로 안 바뀌기도 하죠. 아무리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건데 어떡해요 그죠? 주변에 이런 사람 한 둘 정도는 보셨겠죠? 어쩌면 당신도 해당된다고 고개를 끄덕거릴 수도 있구요.
말했듯이 사람들은 합리화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실에 근거해서 판단하기보다는 이미 내린 판단을 뒷받침하기 위해 근거가 될 사실을 선택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같은 사실을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고, 심지어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는 사실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골라 받아들이곤 하지요. 한 번 밉보이면 벼라별 게 다 미워보인다는 말이에요. 전문용어로는 인지부조화현상이라고 한다죠. 그래서 이유 A가 뭐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여기까지 오면 그건 그저, 싫어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니까요.
내 경우, 지금까지의 얘기에 '싫어하는 사람'에 '나'를 넣으면 되는 거예요. OK? 싫어한다기보다는 '도저히,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정도에 가깝겠지만. 싫어하는 사람이 나 자신이라서 아무리 까도 죄책감도 안 느껴요. 전문가들 말로는 하나같이 내가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한 기준을 적용해서 판단을 내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주변의 평가는 그렇지 않은데도. 힘든 건 피해자로서의 나인 거죠. 가해자가 나니까 도망도 못 치고 부인도 못 하고. '그래 맞아 난 무능력자, 잉여, 인생의 실패자야 으흑흑' 여기서 시작되는 우울증의 증세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드리지 않겠습니다. 혹시나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면서 삶을 잘 영위하실 수 있는 분이 있으시다면 간절히 바라건대 비법을 전수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거든요.
그냥 멋대로 판단내리는 거지만 내 경우 문제는 자기혐오 그 자체보다 그 혐오가 인지부조화를 부를 정도로 완고하다는 점일 거예요. 그냥 자기혐오였다면 주변 사람들 칭찬이나 격려로 회복이 됐겠죠. 적어도 몇 년 전엔 그랬는데 이젠 약발이 안 먹히네요. 대상이 바로 나니까, '날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라는 깨기 힘든 쉴드까지 쳐지는 거죠. 주변에서 다들, 나 자신마저도, 난 그렇게 싫어할 만할 인물이 아니라고 옹호를 해 주지만, 그렇다고 설득되진 않네요. 'ㅅ'=3 (으쓱) 심지어 스스로 그 말이 타당한 것 같다고도 생각하는 경우에도 말이에요. 말했잖아요. 싫은데 어쩌라구요.
그래서 '왜' 스스로를 그렇게 괴롭히느냐, 라는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이런저런 근거를 들어 설득하고 싶으시겠지만, 난 그런 얘기를 지금까지 한 두 번 들은 게 아니고 이제 사실 좀 지겨워요. 앞에서 예를 든 패턴을 전혀 벗어나지 않는 반박에 재반박을,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대상으로 해서 계속하고 싶진 않아요. 나한텐 내 근거가 있고, 아마도 내 지지자(?)들이 가지고 있을 근거보다는 훨씬 확고하다고 생각해요. 아직까지는.
...이렇게까지 얘기해도 안 먹히는 건 안 먹히겠지...
어쨌든, 이런 생각과 그에 따라오는 증세가 정상적인 게 아님은 알고 있으니, 그 사이클을 끊기 위해서 계속 노력은 할 겁니다. 어디서 끊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구책으로 어떻게 될 수준은 예전에 안드로메다로 멀어진 거 같으니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 적어도 도움을 거부하지는 않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여러 가지 방책을 궁리중이니 어떻게든 되겠죠.
